2011 방콕자매도시 청소년 프로그램
(2011 Bangkok Sister City Youth Program)

국내 사전 교육: 2011년 3월 4일(금) ~ 3월 22일(화), 오리엔테이션 포함 총 6회 모임
               국외 현지 파견: 2010년 3월 23일(수) ~ 3월 31일(목), 8박 9일

박 솔 희
(숙명여자대학교 정보방송학과)

 

새벽 네 시가 넘어갈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출국 전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게다가 조금은 초조하기도 했다. 빼놓은 물건은 없는지 부산스레 살피다가 간신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 딱 한 시간 남짓을 겨우 자고 일어나니까 부쩍 현실감이 느껴졌다. 가는구나, 태국.

한국은 아직 꽃샘추위가 기승인 초봄. 사철 따뜻한 방콕의 기후에 맞춰 가벼운 여름신발에 햇볕가리개용 밀짚모자까지 썼다. 문 밖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그렇게 공항철도에 몸을 싣고 인천공항까지 갔다. 사위는 그제야 밝아져 온다. 진짜 내가 외국으로 나가고 있구나. 설레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 방콕 도착! 예감 좋은 환대, 완벽한 프로그램 운영

인천공항에서 10시 5분에 출발한 타이항공을 타고 방콕의 수완나품 국제공항에 도착한 때는 현지 시각으로 약 오후 2시. 방콕시청 직원분과 우리 서울시 대표단의 생활을 도와줄 태국인 스태프 기프트(Gift)가 나와 있었다. 태국의 이름은 아주 길고 어려워서 대부분 짧은 애칭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인 입국 수속을 밟지 않고 방콕시청 직원 분을 따라 특별한 게이트를 통과해 공항을 빠져나갔다. 방콕 시청이 이 프로그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공항에서 약 30분을 달려 숙소인 싸얌 시티 호텔에 도착했다. 태국풍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고급 호텔이었다. 이 역시 방콕시에서 프로그램에 지원을 많이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태국 스태프와 2인 1실로 방을 같이 쓰도록 배정받았다.

프로그램 첫째 날 나는 곧바로 이 행사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4년째 대학생활을 하면서 여러 번 국제행사에 참가하거나 통역을 맡을 기회가 있었는데, 취지에 맞게 잘 운영되는 행사도 있지만 겉으로 내세우는 것과 달리 실속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행사를 급하게 준비해서 운영이 엉망이거나, 행사의 틀은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하더라도 전반적인 분위기가 살지 않아서 마음을 터놓기 어려운 경우 많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방콕 자매도시 청소년 프로그램은 정말 굉장했다. 각국에서 장시간 비행해 오느라 아직 피곤하고 서로 서먹해하는 참가자들 사이로 태국 스태프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다들 열정이 넘치고 표정이 밝았다. 듣자 하니 한 달 전부터 만나서 행사를 준비했다고 했다. 오리엔테이션도 확실하게 되어 있어서, 자신들이 무슨 역할을 해야 하고 참가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행동하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한다는 책임감을 넘어서, 진심으로 참가자들을 도와주고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친절한 마음까지 전해져 왔다.

아이스브레이킹 때 스태프들을 소개하고 몇 가지 게임을 같이 했는데, 단순히 참가자들뿐 아니라 방콕시청의 공무원들 그리고 각국에서 참가자들을 인솔해 온 지도자들까지도 함께 융화되어 어울렸다. 국적과 나이와 성별 모든 것을 넘어 모두의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뜻했다.

또 한 가지 의미심장했던 것은, 아이스브레이킹과 전체 일정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기 전에 일 분간 일본에 일어난 재앙에 대해 애도하는 시간을 가진 일이었다. ‘이런 걸 진짜 국제적인 우애와 연대라고 하는구나’ 싶어 조금 찡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에서는 후쿠오카 학생들이 참가했는데 후쿠오카는 지진이 일어난 곳과는 거리가 있어서 별 피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방콕에 올 수 있었다고 했다.

- 왕의 발자취를 따라서, 왕실 주도 프로젝트

이번 프로그램의 부제는 ‘왕의 발자취를 따라서(Following his Majesty of Royal Kingdom)'로서 태국 왕실이 주도하는 프로젝트 현장을 돌아볼 기회가 많았다.

왕실 주도 프로젝트는 과거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과도 비슷하게 관에서 주도하여 소득 증대 및 생활수준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다만 다른 점은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이 산업화를 목적한 것이었던 반면 태국의 왕실 주도 프로젝트는 주로 농업에 관한 것들이다. 태국도 한때 산업화를 소망한 적이 있었지만 실제 주민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정책을 현실화했다고 한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뜨라다 궁전(Chitralada Palace)로 현재 태국 국왕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했다. 왕궁이 거대한 영지처럼 돼 있어서 곳곳에 밭이며 소규모 공장들이 있었다. 왕실이 인정하는 고품질 스피루리나, 유제품, 양초, 종이, 숯, 여러 종류의 쌀 등을 생산하고 유통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나중에 펫차부리 지방에 가서는 왕이 별장으로 쓰기도 하는 창 후아 문 프로젝트(Chang Hua Mun Project)를 둘러봤다. 일종의 너른 영지 같은 곳이었다. 후아사이 센터(Huay Sai Center)에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머물면서 태국의 식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배우고 조그만 댐을 함께 만들어 보기도 했다.

태국은 토양이 딱딱해서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식물을 심으면 죽어버리고 마는데, vertival grass라고 하는 풀을 심으면 풀이 자라면서 그 뿌리가 딱딱한 흙을 부수어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다고 했다. 이는 현 국왕이 연구하여 보급한 결과라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태국 사람들이 왕실을 존경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국왕이 직접 아들과 함께 트랙터를 몰며 논일을 하는 사진도 여러 번 볼 수 있었는데, 비록 제스처일지라도 국민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 역동적인 관광대국 태국, 천사와 자유의 도시 방콕

태국에 와서 놀란 점은 태국이 굉장한 관광 대국이라는 점이었다. 태국의 수도인 방콕은 서울에 맞먹는 대도시였고 서울만큼이나 글로벌했다.

유명한 에메랄드 불상이 있는 왓 프라깨우, 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바이욕 타워, 태국의 역사와 전통을 화려하게 재현해준 시암 니라밋 공연, 짜오프라야 강에서의 디너 크루즈……. 프로그램의 컨셉이 ‘태국’ 그 자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태국의 관광지를 둘러보면서 상대적으로 한국의 관광 자원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절감했다. 나는 국내여행을 많이 다녀서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방방곡곡을 대부분 돌아다녔는데, 방콕의 활기에 비해 국내여행지들이 많이 초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문화가 태국보다 뒤떨어지거나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바이욕 타워가 63빌딩보다 높을지는 몰라도 왓 프라깨우보다는 경복궁이 더 품위 있다. 역사와 전통도 한국이 훨씬 오래됐다. 태국이 관광 대국이 된 것은 그들이 가진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알며, 또한 계속해서 계발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훌륭한 문화자원을 가지고도 그걸 잘 이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방콕에 비해 서울의 활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사회 분위기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심각한 청년실업으로 음울하기 짝이 없는 서울과는 달리 방콕의 젊은이들은 걱정거리가 없어 보였다. 취업에도 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호황기 때처럼 태국 경기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또한 태국 문화가 매력적이라고 느낀 점은 그들의 자유와 다양성이다. 아무래도 관광지이고 외국인들이 많다 보니 더욱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겠지만, 아직도 획일적인 전통이 남아있는 한국과 달리 각자의 개성을 물씬 표출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한국인들의 몰개성을 특히 느낀 것은 짜오프라야 강의 디너 크루즈 때였다. 유람선에는 우리 일행 말고도 각국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국 관광객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말소리를 듣지 않아도 그들이 한국 사람임을 알 수 있었던 게, 아주머니들이 죄 똑같은 파마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동남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그렇듯 태국에도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많은 편이라고 하는데 그들에 대해서 모두가 편견 없이 대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참가자나 스태프 중에도 동성애자가 몇 명 있었는데, 한국에서라면 필시 많은 마음고생을 했을 그들이 전혀 배척받지 않고 어울리는 모습은, 한국 사회가 반드시 배워야 할 관용이라고 생각했다.

- 우정을 위한 우정, 우리가 순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우리가 같은 나이 또래의 청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국적도, 사용하는 언어도, 인종도 모두 다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우리가 20년이 지난 후에 만났다면 지금과 같이 살가울 수 있었을까? 그저 순수하게 우정을 위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프로그램 중 방콕시청에서 주관하는 ‘Together We Care - Bangkok for Japan’이라는 행사에 모두가 참가하게 됐다. 일본의 대지진에 대해 함께 애도를 표하는 의미로, 방콕 지상파 방송으로 생중계되며 태국의 주요 인사와 유명인들도 많이 참여하는 큰 행사였다. 일본에서 온 히로코가 대표로 연설하고, 각국에서 한 명이 단상에 함께 올라갔다. 우리는 인간 띠로 하트 모양을 만들고 촛불을 켜 들었다.

Together We Care. 상대를 아끼고 걱정한다는 제스처. 우리가 촛불을 켜고 성금을 보낸다고 해서 당장 일본이 멀쩡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이 행사 자체에 모종의 정치외교적인 목적이 숨어 있는지도 몰랐다(태국과 일본은 오래 전부터 꽤 우호가 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국제 우호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로지 말 그대로의 우호 증진을 위한, 우정을 위한 우정을 나누는 일. 이것은 오로지 우리가 순수한 청소년들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 방콕앓이 BANGKOK FEVER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사실 나는 방콕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사실은 태국(Thailand)과 대만(Taiwan)도 헷갈려할 정도였으니 긴 말이 필요 없겠다.

하지만 귀국 후 사흘이 흘러간 지금, 나는 아직도 호된 방콕앓이를 하고 있다. 양손을 합장하고 “사왓디캅” “사왓디카”하며 친절하게 ‘와이(태국식 전통인사)’를 보내던 태국인들의 친절한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태국에서 가져온 과자를 먹고 태국 엽서를 뒤적이며 시장에서 산 코끼리 베개를 안고 잠든다.

프로그램을 통해 보통의 여행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태국 전통 악기와 춤, 무에타이 등을 체험할 수 있었고, 태국 말고도 각국에서 온 친구들의 문화를 나누고 교류했다. 전 세계의 과자를 맛보고, 각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함께 사진을 찍고, 함께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버스에서 중국, 러시아, 베트남, 독일,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친구들과 어울려 한국 놀이를 했던 것도 잊을 수 없다. “팅팅팅팅 탱탱탱탱 팅팅 탱탱 후라이팬 놀이!”

방콕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는 한류 열풍을 몸소 실감할 수 있었던 것도 특별했다. 시장 귀퉁이를 지나가다보면 그냥 한국 가요가 흘러나오고 대형 쇼핑몰 입구에 붙어있는 한국 가수의 콘서트 광고판 앞에서는 태국 여학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모두가 한국 드라마를 알고 몇 마디쯤의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친구들도 많았다. 단지 내가 그런 문화를 가진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호감을 가져주어서 참 고맙고, 또한 문화의 위력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 스태프 중 한 명인 파(Fah)가 그런 말을 했다. “BSCYP is over but our relationship is just beginning.”

실제로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프로그램 이후에도 페이스북을 통해 계속해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서울 대표단이 거리공연 때 배경음악으로 썼던 곡이 뭐냐고 물어오는 친구도 있고(우리는 지누션의 와 함께 탈춤을 선보였다), 기프트(Gift)는 벌써 다다음주에 서울에 놀러오기로 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멀지 않은 아시아에 살고 있고 서로의 언어를 전공하는 경우도 있어서(예를 들어 일본어를 전공하는 태국 친구도 있었다) 앞으로도 아름다운 교류가 이어질 전망이다.

9일간의 방콕. 백여 명의 친구들. 그리고 끝나지 않은 우정.

이 글은 내 이십대의 한 페이지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