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활동경험담

청소년 나라사랑 체험프로그램
글쓴이 조수빈     소속 중학교

날짜 13.06.20     조회 3322

국제활동 경험담
  • 서울시립청소년문화교류센터 미지
  • 2012년 당선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중에서-

 

 

지금의 한국이 있기까지는 윤동주 시인을 비롯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분들 덕에 한국은 일제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의 희생은 단순히 일제의 지배를 받던 한국을 지켜낸 것이 아니다. 독립 운동가들은 한반도와 한민족이 일궈낸 오천 년의 세월을 지켜냈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만주 지역의 한국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역사 조작 프로젝트이다. 중국은 만주 지역의 한국 문화재를 중국의 문화재로 둔갑시킬 뿐 아니라 문화재를 의도적으로 허술하게 관리해 문화재가 훼손되는 것을 방관한다. 다른 나라가 한국 문화재를 연구하는 것도 하지 못한다. 중국 학생들은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역사라고 배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는 이유는 간도 지방의 땅을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905년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으로 당시 조선의 땅이었던 간도가 청으로 넘어갔다. 지금 우리가 간도를 되찾을 수는 없지만 간도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그대로 머물러 있다. 이에 중국은 간도 소유에 대한 정당성을 마련하기 위해 간도 지역의 한국의 역사를 아예 조작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청소년 나라사랑 체험프로그램은 만 15세에서 24세의 청소년들을 국내 등지와 중국 만주지역에 파견해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갈 젊은 세대가 동북공정의 심각성을 알고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여성가족부 주관으로 올해 처음 시작되었다.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이 프로그램을 처음 알게 된 후 나는 바로 중국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일정이 고구려·발해 유적지,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등 유명한 유적지와 압록강·두만강, 백두산 등 북한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비용은 원래 비용의 반값인 60만원으로, 부모님께서도 이 가격에 이렇게 유익한 일정으로 여행을 갈 기회는 또 없다면서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프로그램의 내용 말고도 내 마음을 움직인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건 바로 ‘가족과 함께’가 아닌 ‘혼자’ 중국에 간다는 점이었다. 매번 가족과 함께 여행하던 나에게 혼자 여행하는 일은 내가 항상 꿈꿔오던 것이었다.

운 좋게도 제주지역은 참가신청자가 적어서 나는 바로 선발될 수 있었다. 여행 전에 제주청소년수련원에서 사전워크샵이 있었다. 그곳에서 앞으로 6박7일 동안 같이 중국을 돌아다닐 참가자들을 만났다. 나까지 포함해서 참가자는 총 27명이었는데 고2가 특히 많았다. 나는 중3으로 그 안에서는 막내였다.

처음 만나면 항상 그렇듯 많이 어색했다. 대학생이 모두 우리 조로 몰려서 더 부담스러웠다. 5시간 정도 진행된 워크샵에서는 친목 도호 활동, 이런저런 토론, 공동과제 계획 짜기 등의 활동을 했다. 우리는 공동과제인 UCC의 컨셉을 중국에 파견된 역사특공대로 잡고 UCC에 넣을 내용을 분담해서 조사하기로 약속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조원들하고 아직 어색하기는 했지만 첫인상은 다들 좋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캠프를 갈 때쯤 방문지 조사를 하면서 공동과제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과제를 치일피일 미뤘다. 그러다가는 결국 내가 어느 부분을 조사하기로 했는지도 까맣게 잊어 버렸다. 나는 결국 조사를 단념하고 마냥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기다렸다.

 

 

여행은 제주공항에서 시작됐다. 비행기가 지연되면서 청주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보다 1시간 정도 늦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도착한 청주공항은 휑했다. 제주공항이었다면 아직도 북적거릴 시간이었다. 그제야 나는 여행 전 청주행 비행기편을 검색했을 때 청주로 가는 비행기가 하루에 열 개도 되지 않았다는 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제주에는 항상 비행기가 들락거렸다. 그때 나는 제주도에 태어나서 크고 좋은 공항, 다양한 비행기편을 이용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공항에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천안에 있는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으로 이동했다. 수련원이 있는 곳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촌마을이었다. 도로도 시멘트도로였다. 그런 마을을 처음 본 나는 정말 신기했다. 나는 제주시를 벗어나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수련원에서 우리는 저녁을 먹고 캠프를 함께할 선생님(송애영 선생님, 강규석 선생님, 박노경 교관님)을 만났다. 선생님들은 앞으로 어떤 일정이 진행될지, 식사와 호텔은 어떤지, 중국에 가서 지켜야 할 주의사항 등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늦어서 어느새 밤 11시가 되었고 나는 그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은 인천공항으로 가기 위해 해뜨기 전에 일어났다. 두 시간 동안 자고 나니 인천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인천공항은 항상 거대했다. 면세점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가족하고 같이 여행을 갔다면 여느 때처럼 면세점 구경도 다녔을 텐데 나 혼자 친구도 없이 갈색 모자에 초록색 단체조끼를 입고 있으니 혼자인 내 신세가 절감이 됐다. 2조와 3조는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다들 금방 친해진 것 같았다. 우리 1조 같은 경우는 절반이 대학생이었다. 거기에 나를 포함한 중3 두 명, 고1 두 명, 고2 한명이 있었다. 나중에 가서는 다들 친해졌지만 여행 중반에 이를 때까지 1조는 유독 서먹했다.

  

 

대련공항 근처에서 가이드 미팅을 하고 바로 여순감옥으로 출발했다. 그날 일정은 여순감옥뿐이었다. 뤼순형무소라고도 하는 여순감옥은 신채호, 이회영, 안중근 등 많은 한국 독립투사들이 수감되고 처형되었던 곳이다. 처음 감옥은 러시아가 지었지만 여순 지역이 일제의 지배하에 넘어가면서 감옥이 크게 증축되었다. 감옥에 처음 들어가면 검색대가 나온다. 검색대에서 죄수들은 알몸으로 검색을 받고 통과한다. 또한 죄수마다 입고 먹는 게 다른데 일제에 복종적인 죄수가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는 죄수들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유발하기 위함이다.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계속 가다 보면 대(大)자 모양의 고문대, 감방이 줄지어 있는 통로가 나온다.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 선생 외 다른 한국인 독립투사들에 관한 전시관도 마련되어 있었다. 처형장에 갔을 때는 입구에서부터 섬뜩한 기운이 올라왔다. 여순감옥 사료에 따르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이 처형장에서 700여 명의 죄수가 처형됐다고 한다. 천장에는 끈이 매달려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끊어왔던 잔인한 유물이었다. 처형대 옆에는 안에 해골이 들어있는 오래된 나무통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해골은 실제 사람의 것으로 당시 처형 뒤 시체를 나무통에 반으로 접어 넣어서 매장했다.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신 처형장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후 동양의 평화를 주창하며 당당히 일본 법원에 맞서다 여순 감옥에 수감되셨다. 안중근 의사의 절개는 일본인 간수들에게도 은근한 존경을 받았으며 처형될 때에도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서 죽음을 맞으셨다고 한다. 비록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의사의 참뜻은 세계에 전해지지 못했지만 안중근 의사의 죽음은 여전히 아름답고 값졌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되신 자리에서 우리 일동은 묵념을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와 수많은 독립투사들에게 깊은 존경을 보낸다. 그 뜻을 본받아 우리는 민족의 과제 통일을 이루고 빼앗기고 조작된 우리 역사를 되찾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여순감옥 관람 후 4시간을 달려 단동 가일양광에 도착했다. 호텔 근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샀다. 과일가게에 갔는데 과일은 한국보다 싼 편이었다. 그곳에서 한국에서는 못 보던 배를 샀다. 영어 교과서에나 나오는 서양 배였다. 엄마 말로는 그 배는 맛이 없다고 하는데 그 배는 먹을 만 했다. 또 대형슈퍼에도 갔다. 과자가 많이 있었는데 오리온 과자도 꽤 많았다. 오감자 종류가 그렇게 다양한지 몰랐다. 하지만 먹어보니까 맛은 다 똑같았다. 중국 과자나 한국 과자나 다 비슷비슷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호텔식은 입에 별로 안 맞았다. 중국 식당에서 먹은 음식은 대체로 맛있었는데 호텔식은 제일 좋았던 비용호텔조차 빈약했던 것 같다. 나는 그래서 아침에는 거의 호텔식 대신 컵라면을 먹었다.

그 날 일정은 고구려 유적지 탐방이었다. 단동에서 집안으로 5시간 이동했다. 중국은 워낙 크기 때문에 어디 가려고 하던 장시간 이동이 예삿일이라고 한다. 나는 에어 목베개와 실내화를 가져갔는데 여행 내내 정말 유용하게 잘 썼다.

집안에서 차창을 통해 국내성터를 보았다. 국내성은 1920년대까지만 해도 원래 모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1921년 중국 정부가 성을 개수하면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초라한 성벽만이 드문드문 남아서 천 오백년 전 이곳에 국내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신히 보여주고 있었다.

국내성터를 지나 중식을 한 뒤 오호묘로 이동했다. 오호묘는 귀족의 묘이다. 안에는 사신(四神)이 싸우고 희롱하는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실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이지만 보안이 매우 허술했기에 우리는 모두 플래시를 터뜨리면서 사진을 찍어댔다. 보존을 위한 목적으로 묘 주변을 시멘트로 발라 굴처럼 만들어 놨는데 이 때문에 묘 안에 습기가 차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면서 벽화가 훼손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벽화는 아름다웠다. 천 년이 넘은 그림이지만 여전히 역동적이고 재기가 넘치고 있었다.

  

 

 

오호묘 바로 근처에는 광개토대왕비가 있었다. 비석은 유리벽 안에 갇혀 있었다. 광개토대왕비는 높이가 6m나 되는 엄청나게 큰 비석으로 한국 역사가 남긴 가장 큰 비석이다. 비석의 사면에 빼곡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고구려의 역사, 광개토대왕의 업적, 관리규정에 이르기까지 총 1775자에 달한다. 현재 일본과 중국에서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가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변조 또는 오독되었을 여지가 크다. 이러한 이유로 광개토대왕비 같은 경우는 사진촬영에 대한 제재가 심했다. 우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호묘 촬영에서 얻은 자신감에 힘입어 광개토대왕비 안에서도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공안들의 눈에 띄어서 결국 우리는 현수막을 빼앗겼다. 선생님들은 처음에는 공안들에게 따지셨지만 문제가 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수막을 돌려받지 못하고 버스에 타야 했다. 그때 박 교관님이 화가 나셔서 근처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에 걸어가야 한다는 가이드 말을 무시하고 바로 장군총으로 이동하라고 하셨다. 교관님 기분이 어땠을지는 이해가 되지만 그 때문에 광개토대왕릉을 보지 못한 게 나는 아직도 아쉽다.

 

장군총에 도착하자마자 공안이 가이드에게 달려와 언성을 높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의 일이 그쪽에 벌써 연락이 간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으름장을 놓는 공안의 모습과 연신 사과하는 가이드를 보자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한국 비석을 한국인들이 보고 사진을 찍는다는데 중국인들이 무슨 자격으로 간섭하는가. 빼앗긴 역사의 현실을 처음으로 맞닥트린 순간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장군총에 있는 내내 공안의 눈치를 봐야 했다. 장군총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계단 피라미드형 무덤이다. 거대한 화강암 절석으로 되어 있고 사면에는 원형을 유지하기 위한 바위덩어리가 면당 세 개씩 있다. 다만 뒷면의 바위 하나는 도난당해서 두 개의 바위만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쪽 면은 약간 찌그러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장군총의 꼭대기에는 버섯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한다. 원래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장군총 꼭대기까지 갈 수 있었지만 버섯 바위에 금이 간 후로는 안전상의 문제로 현재는 계단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장군총 바로 옆에는 장수왕의 부인 묘로 추정되는 작은 묘가 있다. 역시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장군총과 비슷한 양식이다. 장수왕 부인 묘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곳저곳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떨어져 나간 곳에는 절석을 끼워 맞췄던 홈이 드러나 있어 이 무덤과 장군총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장군총도 어김없이 동북공정의 타깃이다. 중국 측은 장군총을 장수왕의 무덤이 아닌 단순 귀족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 유적지 탐방 후의 일정은 통화로 이동해서 열차를 타는 것이었다. 그 열차는 다음날 백두산 일정을 위해 우리를 이도로 실어다 줄 매우 중요한 열차였다. 하지만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그날 집안 지역에 내린 계속된 비로 인해 큰 홍수가 났고 통화로 가는 모든 길이 통제되었다. 우리는 휴게소에 머물며 도로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다가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단 집안 시내로 들어가 그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압록강변의 공원에 갔다. 산책 나온 사람들로 공원은 북적거렸다. 우리는 화단에 앉아서 노래도 부르고 장기자랑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마침내 집안 시내의 호텔에 머물기로 결정이 났다. 호텔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욕실은 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훤히 비쳤다. 그래서 그 날은 씻지 않고 그냥 잤다.

 

 

셋째 날은 정말 정신없이 달렸던 기억이 난다. 날도 개었고 다행히 홍수가 잘 해결이 돼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통행이 되었다. 문제는 그곳까지 가려면 버스를 여덟 시간 정도 타야 한다는 것이다. 백두산은 오후 네 시 반이면 입장이 끝나기 때문에 시간 안에 도착해야 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몇 시간이고 줄곧 달렸다. 이도에 세시쯤 도착한 뒤에는 버스를 갈아타 새로운 가이드와 함께 백두산으로 달렸다. 버스에 탄 내내 조마조마했는데 우리는 정말 운 좋게도 시간 안에 백두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선택한 코스는 봉고차로 백두산을 오르는 북파 코스였다. 백두산을 오르는 코스는 북파, 남파, 서파, 동파로 4개 코스가 있다. KBS 1박2일을 통해 잘 알려진 코스는 서파-북파 코스이다. 하지만 최근 안전상의 문제로 그 코스는 폐쇄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북파 입구는 한산한 편이었다. 구불구불한 대기 통로를 바로 버스에 탔다.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려서 봉고차 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또다시 봉고차로 갈아탔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백두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봉고차는 현란한 중국 가요를 틀고 백두산을 올랐다. 하산하는 차와 등산하는 차 모두 서로를 스칠 듯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가는 내내 도로 포장이 된 곳이 있고 안 된 곳이 있고 길 중간에 철심이 튀어나와 있는 등 코스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산을 통째로 깎아내려 길을 낸 곳도 보였다. 민족의 영산이 중국 정부의 장삿속으로 착취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백두산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산림한계고도인 2000m 이상 올라가다 보니 과연 듣던 대로 나무 없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있었다. 또 마치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바람에 잔디가 따라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천문봉에 도착했을 때는 5시 30분이었다. 6시 30분에 봉고차가 끊기기 때문에 서둘러서 계단을 올랐다. 천문봉에서 10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천지가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옷이 펄럭거렸다. 사실 나는 제주도에 살면서 한라산 한 번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높은 산에 갈 때 외투가 왜 필요한지 몰랐다. 덕분에 백두산까지 가서 호되게 당했다.

천지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천지는 화창했고 조각구름이 여기저기 떠 있었다. 천지는 말이 필요 없는 장관이었다. 절벽에 쌓여 있는 그 모습을 계속 찍었지만 카메라가 내가 원하는 만큼 천지를 담아주지 못했다. 나는 결국 촬영을 그만두고 천지를 감상하면서 머릿속에 가득 담았다. 아직도 천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바람이 세차게 불던 절벽과 그 안에서 고요하게 머물러 있던 천지의 모습이 바로 떠오른다. 나중에 성인이 되면 반드시 부모님과 등산을 좋아하는 이모를 모시고 백두산을 다시 찾아야겠다.

  

6시 30분에 봉고차와 버스를 타고 다시 북파 입구에 도착했다. 시간상 장백폭포에는 가지 못했다. 그래도 원래 예정된 시간에 백두산에 갔으면 관광객들이 많아서 버스와 봉고차 대기시간, 백두산까지 올라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훨씬 길었을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백두산에서 내려와 저녁까지 먹고 나자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연길로 이동하는 동안 이도에서 새로 만난 가이드분이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나는 피곤해서 가이드분 얘기를 듣지 못하고 내내 잠만 잤다.

어수선한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연길 장백송 호텔 앞에 도착해 있었다. 보통 8시면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는데 그날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었다. 장백송 호텔은 좋은 편이었다. 그날도 아마 조모임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뭘 했는지는 가물가물하고 쓰러지듯 잠이 든 기억만 난다.

  

 

 넷째 날 일정은 항일운동 유적지, 두만강, 발해진, 한중우의공원이었다. 먼저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에 갔다. 그곳에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이곳저곳 걸려 있었다. 정말 좋은 시였다. 윤동주 시인의 부드럽고 굳은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대성중학교 관람을 마친 뒤에는 윤동주 시인이 살던 생가에 갔다. 윤동주 시인 생가는 평범한 옛집이었다. 바로 옆에는 명동 교회와 명동 소학교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 가면 윤동주 시인이 시를 쓰는 모습이 저절로 연상될 줄 알았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딱히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명동촌을 떠나고 우리는 도문에 갔다. 도문에 있는 두만강 공원에서 40분 정도 사진을 찍으면서 쉬었다. 나는 몸이 더 안 좋아져서 사진도 찍지 않고 두만강 건너에 있는 북한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앉아 있었다.

도문에 있는 식당에서 중식을 먹었다. 중식을 먹고 버스에서 쉬고 나니 몸이 좀 나아졌다. 덕분에 다음 일정이었던 발해진에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곳저곳 살펴볼 수 있었다.

상경성터에는 성곽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저곳 보수한 부분이 성곽의 나머지 부분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실망한 마음으로 성터를 걷고 있었다. 그때 박 교관님이 주춧돌이 남아 있는 자리를 보여주시며 한때 이 위에 가옥과 궁궐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과연 사방을 둘러보니 탁 트인 평야에 주춧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넓은 땅 위에 있던 발해의 수도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발해박물관에는 유물 몇 점, 역대 발해왕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현정이 언니 말로는 그 그림들이 너무 새것이고 왕들이 입고 있는 노란색 옥의도 당나라풍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정말 발해왕들의 초상이 맞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내 생각으로는 상경성의 구조를 당의 장안성 구조를 따라 만들었듯 발해의 왕들이 당나라풍 옥의를 입고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현정이 언니가 그런 말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 발해성터도 어김없이 동북공정이 착착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발해성터 발굴 과정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 안에서 어떤 유물이 발견이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발해는 분명히 고구려계 유민들이 세운 나라이다. 하지만 중국의 발해에 유물에 당대의 유물을 섞어 넣은 뒤 발해가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발해진을 보고 난 뒤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 김을동 의원이 세운 한중우의공원으로 이동했다. 한중우의공원은 한국인들에 의한 중국지역의 항일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해림시에 위치하고 있다. 한중우의공원에는 ‘주몽의 집’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이름은 다소 촌스러웠지만 그곳이 중국에서 진짜 한식을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었다. 식당 옆에는 역사문화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어느 조선족 분이 해설을 해주셨다. 주로 백야 김좌진 장군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나는 장군의 지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는 공산주의 사상에 젖은 몇몇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사상싸움으로 변질시켜 독립운동이 큰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또한 자유시 참변, 간도 참변, 독립군의 분열 등의 사건이 이어지면서 장군이 의기를 잃으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도남촌에 들어가 평소 꿈꾸던 작은 이상 사회를 실현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 꿈마저도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피격으로 깨지고 말았으니 정말 불행한 일이다.

역사문화관을 관람한 뒤 연수관에서 소집이 있었다. 강규석 선생님이 다음날 김좌진장군 순국지에서 있을 의식에 대해 말하셨다. 그리고 독립군가를 불렀다. 독립군가가 로비에 울려 퍼지자 총을 이고 힘차게 행군을 하는 독립군의 모습이 그려져 잠깐 동안 뭉클했다.

소집 뒤로는 줄곧 자유 시간이었다. 이때 우리 1조가 처음 말을 텄다. 다른 조가 재밌게 노는 걸 보면서 1조도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늦게나마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얌전하던 1조가 본색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밤새 게임을 했고 서먹서먹하던 언니오빠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여행이 정말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다섯째 날은 사실 종일 이동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김좌진장군 순국지에 가서 의식을 치루고 금성정미소와 장군 생가를 둘러보는 일정 하나밖에 없었다. 의식을 치를 때 국가를 부른 뒤 독립군가도 불렀다. 하지만 금세 까먹어서 전날 연습한 대로 노래가 나오지 않아서 의식이 밋밋하게 끝나고 말았다.

‘주몽의 집’에서 중식을 한 뒤로는 하얼빈으로 향했다. 대학생 언니들과 부쩍 친해져서 가는 동안 단체게임도 하고 수다도 떨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더 일찍 친해지지 못한 게 너무 아쉬울 뿐이었다.

하얼빈은 러시아가 오랜 시간 지배한 곳이기 때문에 시내는 서양식 건물로 꽉 차 있었다. 유명한 교회도 보았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서라벌 식당에서 석식을 하고 30분 정도 하얼빈 시내를 관광했다. 이곳저곳 구경하니 어느새 호텔로 갈 시간이 되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비용호텔이었다. 비용호텔은 정말 좋았다. 우리 방은 냉방도 잘 됐는데 몇몇 에어컨이 고장 난 방도 있었다고 한다. 하여튼 1조는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하얼빈에 있는 731부대 죄증박물관에 갔다. 731부대는 전쟁포로 및 기타 구속된 사람들에게 세균실험과 약물실험을 자행했던 무시무시한 곳이다. 

  

 

이 사진에 나온 사람들은 731부대의 실험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마루타의 피부를 벗겨 세균을 주입하는 실험과 마루타를 진공유리관 속으로 밀어 넣어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저압을 측정하는 등 감히 상상하기 힘든 죄악을 저질렀다. 동상 실험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실험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먼저 마루타를 온몸에 동상이 올 때까지 묶어놓는다. 그 다음 얼어버린 팔을 망치로 내려친다. 그러면 팔이 깨지는데 마루타가 고통스러워하지 않아야 성공이라고 한다. 또 다른 실험은 감각을 잃은 팔을 염산에 집어넣어 마루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역시 마루타가 고통스러워하지 않아야 성공이다. 실험이 성공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마루타가 희생되었을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문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731부대는 이 모든 흔적을 지우기 위해 살아남은 마루타를 모두 처형했다. 그동안 제조한 세균 역시 폐기하지 않고 은밀한 곳에 매장했다. 세균실험을 주도했던 이시오 시로 등 부대원들은 면책되었다. 이시이 시로 같은 경우는 일본으로 귀국해 올림픽 위원장까지 맡으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죽었다. 그 후손들 역시 선조의 은덕을 입어 아직까지 영화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마치 한국사에서 친일파들이 처단되지 않고 현재 그 후손은 한국 지도층이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731부대 박물관에서는 내내 충격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731부대 박물관 바로 옆에 있던 식당에서 우리는 마지막 식사를 했다. 번호도 주고받았고 제주도에 가면 꼭 연락하자는 말도 했다. 말은 안했지만 정말 연락도 하고 얼굴도 볼 기회가 자주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중식을 한 뒤 우리는 하얼빈에서 1시간 30분 떨어진 하얼빈태평공항으로 향했다.

 

 

6박7일간의 나라사랑 캠프 일정은 여기서 끝난다. 원래 예정은 하얼빈-인천, 인천-제주로 가는 것이었지만 기상 악화로 인천행 비행기가 4시간 가까이 지연되어 제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날은 김포에 있는 국제청소년센터 유스호스텔에 묵고 다음날 제주로 돌아갔다.

그때 우리가 제주도로 모두 돌아올 때까지 강규석 선생님과 송애영 선생님이 공항에서 기다려주셨다. 선생님들께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좋은 선생님들, 좋은 참가자들과 함께한 덕에 이번 나라사랑 캠프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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